르네상스형 천재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특히 초기 소설들은 인트로에서 장황한 인문학적 배경설명을 통해, 독자 자신이 스스로 무지함을 깨닫고 겸손하게 살기를 마음먹고 소설 읽기를 포기할 즈음부터 본격적으로 재미있어지는 특징이 있는데, 바우돌리노는 초기 소설들과는 달리 읽기 편한 문체와 중세의 전설, 민담, 음모론적 요소들을 녹여 두어 판타지 영화를 보는 듯한 재미를 준다.
슬픈 눈의 어떤 사람이 와서 말했다. 「저는 제가 어디가 아픈지 모르겠습니다. 」
「난 알고 있소.」 바우돌리노가 말했다. 「당신은 무기력자요.」
「어떻게 치료해야 합니까?」
「무기력은 태양의 움직임이 아주 느리다는 것을 알아차리 게 될 때 처음으로 나타난다오.」
「그러면?」
「절대 태양을 바라보지 마시오.」
「저분에게는 아무것도 숨길 수가 없어.」 셀림브리아의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
「어떻게 이렇게 지혜로우실 수가 있습니까?」한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바우돌리노가 대답했다. 「나를 감추기 때문이오.」
「어떻게 감출 수 있습니까?」
바우돌리노가 한 손을 펴서 그에게 손바닥을 보여 주었다. 「당신 앞에 보이는 게 뭐요?」 바우돌리노가 물었다. 「손입니다.」남자가 대답했다.
「내가 얼마나 날 잘 숨기는지 보았지요.」 바우돌리노가 말했다.
아버지를 죽인 죄책감으로 기둥 위에서 고행하던 중 사람들로부터 성자로 추앙받던 바우돌리노의 상담 내용. 이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장면으로, 다시 보고 싶어, 20년 만에 다시 읽었다.
희대의 거짓말쟁이 바우돌리노가 겪은 것인지 꾸며냈는지 알 수 없는, 마치 포레스트 검프처럼 시대 흐름의 중심부 가까이에 있는 바우돌리노와 그 일당의 모험담(?)으로, 소설 속의 스토리가 소설 속에서도 사실인 지 허구인지 모호하게 서술하여, 소설(영화, 연극, 뮤지컬, 만화 등)이 주는 즐거움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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